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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성인, 성녀, 복자, 세례명

(여자 세례명 추천) 소화 데레사 성녀 (축일 ; 10월 1일)

by 미남의 전설 2024.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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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예수의 성녀 소화(小花) 데레사
 

서울 광장동성당 안에 있는 소화데레사 성녀 사진
(위 사진은 서울 광장동성당 성전 출입문 위에 있던 소화데레사 성녀 사진입니다.)


테레사 성녀는 프랑스 북서부 바스-노르망디(Basse-Normandie)의 알랑송(Alencon)에서 시계 제조업을 하던 루이 마르탱(Louis Martin)과 젤리 게랭(Zelie Guerin)의 아홉 자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성녀 테레사(Teresia, 또는 데레사)의 원래 이름은 마리 프랑스와즈 테레즈 마르탱(Marie Francoise Martin)이었습니다.
성녀를 지칭할 때, 세례명으로 언급할 때 주로 ‘소화(小花)데레사’라고 많이 부릅니다.

그녀는 4살이 되기도 전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와 함께 오빠가 사는 리지외로 이사를 갔습니다.
성녀는 어린 시절부터 성모 마리아 공경에 진지한 삶을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7살 때부터 고해성사를 즐겨 받았고, 10살 때인 1883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석 달 동안 심하게 앓았는데, 때로는 경련과 환각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의식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그녀는 ‘미소의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던 중 성모님께서 미소 지으면서 이 병이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테레사 성녀는 1884년에는 첫영성체를 하고 그 얼마 후에는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1886년 성탄 전야 미사 직후 ‘완전한 회심의 은총'을 체험한 성녀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삶을 자신의 소명으로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으로 테레사는 리지외의 카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녀는 기도생활에 열중하였고, 수도원 규칙에 충실하고 자신에게 부여된 작은 직무들을 충실히 이행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테레사 성녀는 죽기 18개월 전에 처음으로 결핵의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기 얼마 전 병상에 눕기까지 테레사 성녀는 수녀원의 기본 의무들을 충실히 지키고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의 시련을 겪고 1897년 9월 30일에 선종하였습니다.

그녀가 죽은 일 년 후 카르멜 수녀회의 통상 관습대로 그녀의 자서전이 비공식적으로 출판되어 여러 카르멜 수녀원에서 읽혀졌고, 많은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이를 출판되어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고, 세계 여러 나라에 수백만 권이 넘게 보급되었습니다.

교황 비오 11세는 테레사 성녀가 선종한지 28년이 지난 1925년 5월 17일 ‘아기 예수의 성녀 테레사’로 선포하였습니다.

교황 비오 12세는 그녀를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우스(Frianciscus Xaverius)와 더불어 ‘선교 사업의 수호자’로 선포하였고, 1944년 5월 3일에는 성녀 잔 다르크에 이어 프랑스의 제 2의 수호자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Ⅱ)는 1997년 6월 10일 성녀 테레사를 보편교회의 교회학자로 선포하였습니다.

 

수원 매탄동성당 주보성인 성녀 소화데레사


위 사진은 수원 매탄동성당 주보성인이신 소화데레사 성녀 상(像)입니다.

 

테레사 성녀가 주보성인인 성당이 참 많습니다. 제 주위에도 세례명이 소화데레사인 자매님도 많고요.

소화데레사가 주보성인인 성당에 가면 장미꽃을 품에 안으신 성녀의 모습이 그려진 석상이 많습니다.

테레사 성녀님이 선종하기 전에 "내가 천국에 가면 지상에 장미의 비를 내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하지요. '장미의 비'는 은총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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