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tholic Life (+천주교 기도문)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역사

by 미남의 전설 2024. 5. 19.
반응형

천주교회의 창설 그리고 천주교 4대 박해의 원인, 과정, 특징, 결과 

 

천주교회의 한국 전례는 조선 후기 젊은 학자들에 의하여 주체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없이 학문적 연구를 통하여 신앙 실천으로 이어져 자치적인 교회가 창설된 것은 전 세계의 선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독특하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1777~1779년에 천진암(天眞菴) 주어사의 강학회는 학문적 연구에서 신앙의 발단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광암 이벽은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더욱 깊이 알아보고자 하였습니다.
이승훈이 이벽의 간절한 권고를 받고 북경으로 가서 그라몽 신부로부터 1784년 초에 세례성사를 받고 귀국하는 계기가 되어 1784년 9월(음력)에 우리나라에서 첫 세례성사가 베풀어지고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도 세례성사가 집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이벽의 주도로 정약종, 권일신 등이 함께 1784년 명례방의 김범우 집에서 정기적인 신앙 모임을 가졌는데 이것이 한국 천주교 역사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조정 입장에서는 천주교 신앙이 유교적 국가 시스템을 흔드는 큰 위험 요소로 보았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고 탄압합니다.


그리하여 천주교 신자들은 수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 일명 "4대 박해" 사건이 일어나서 천주교인들은 박해를 받고 많은 분들이 피의 순교를 하게 됩니다.

 

이 사진은 103위 순교 성인 그림입니다. 원본은 사진 속의 혜화동성당 그림입니다.
이 사진은 103위 순교 성인 그림입니다. 원본은 사진 속의 혜화동성당 그림입니다.

 

 

1.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년)

 

신유박해는 1801년(순조 1년) 1월 10일(음력)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 씨의 금교령(禁敎令)으로 시작하여 같은 해 12월 22일(음력)에 반포된 척사윤음으로 끝난 조선시대 최초의 전국적이며 본격적인 박해입니다.

유교적 지도이념을 갖고 있던 당시의 지배 계층은 천주교의 평등사상이 신분계급제도의 조선사회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특히 제사 문제에 부딪쳐서는 천주교를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로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제위 중에는 온건정책을 펴서, 그동안 천주교는 확산되어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고 신자 수가 1만 명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지배계층에서는 정조의 온건정책에 불만을 품고 천주교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정조가 1800년에 승하하자 국면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순조가 11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궁중의 어른인 정순왕후 김 씨가 5년간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순왕후 김 씨는 친정 오라비이며 노론 벽파로 흑산도로 귀양갔다가 죽은 김구주의 정치적 반대파를 타도하여 그 원한을 갚으려 했습니다.
국가 기강을 바로 잡는다는 명분으로 천주교를 탄압하는 방법으로 남인 시파와 노론 시파 모두를 물리치고 조선 역사상 최초의 세도정치를 펼쳐갑니다.
또한 정순왕후는 금교령을 내리고, 천주교 신자들을 역적으로 다스리게 하고 오가작통법이라는 악법을 엄히 시행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철저히 찾아내고 처벌하게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한국 천주교회는 초대교회의 지도자 전원을 잃었고 서울에서만도 300명 이상의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첫 사목사제로 입국한 주문모 신부도 순교하여 이후 33년간 목자 없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황사영은 그의 백서에서 "이제 조선교회는 박해가 없어도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한탄 했을 만큼 초대교회가 받은 타격은 컸습니다.
그러나 이 백서로 순교자들이 많이 나와 큰 감동으로 서민의 가슴속에 교회는 뿌리 내리게 되었고, 살아남은 신자들은 경기,충청,강원,경상도 등 산간 벽지로 숨어 교우촌을 이루고 살아서 천주교는 더 넓은 지역으로 전파되어 발전해 갈 수 있는 토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2. 기해박해 (己亥迫害, 1839년)

 

기해박해는 1839년(헌종 5년) 3월 5일(음력) 우의정 이지연이 순원왕후의 재가를 받은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으로 시작하여, 그해 10월 18일 척사윤음을 반포함으로써 막을 내린 조선시대 두번째 전국적인 박해로 천주교 4대 박해 중 하나입니다.
이 때 희생된 순교자 중에서 70위가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1802년 안동 김 씨 시파 김조순의 딸이 순조비로 순원왕후가 되면서 이후 36년간 안동 김 씨 세도정치가 계속 되었습니다. 안동 김 씨는 천주교에 대해 관용적이어서 순조 재위기간과 헌종 초까지도 비교적 평온한 시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1836년에는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활동하면서 신자 수가 늘어났습니다.

1836년 김유근이 병들어 정사를 살피지 못하게 되자 우의정 이지연은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풍양 조씨와 손을 잡고 안동 김 씨의 세도를 빼앗으려고 시도하면서 천주교 박해를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집권층의 천주교에 대한 무지와 증오, 지방 관리들의 탐욕과 공명심에 의해서 천주교 박해가 논의되던 중에 묘당회의에서 좌포장 남헌교의 사교금입주장을 이지연이 지지하여 순원왕후 김대비의 허락을 받아 사학토치령을 내리게 하여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다시 박해에 휘말려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와 그 뒤 사제를 잃고 이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입국할 때까지 6년간 목자 없는 교회가 되었고 상제상서(上帝相書)로 유명한 정하상 바오로와 조신철 가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등 제 2세대 지도자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당시의 기록인 기해일기에 의하면 참수된 순교자가 54명, 옥사나 장사 또는 병사한 신자 수가 6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달레의 한국교회사에는 참수된 신자가 70명이 넘는다고 했습니다.

기해박해는 신유박해에 비해서 체포된 신자 수는 적었으나 대상 지역은 넓었다는 데 특징이 있습니다. 그동안 신자들이 교우촌을 형성하여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거듭나는 박해로 더욱 침체에 빠지며 깊은 은둔생활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기해박해는 시작과는 달리 진행과정에 정치적 갈등이 없어서 당사자 외에는 큰 관심을 가지거나 천주교인을 처단하라는 상소문도 없었습니다.

 

3. 병오박해 (丙午迫害, 1846년)

 

병오박해는 1846년 6월 5일(헌종 12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9월 20일에 끝이 난 조선왕조의 세번째 전국적인 박해로 천주교 4대 박해 중 하나입니다.
이 박해로 순교한 이들 가운데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현석문 가롤로 등 9명이 순교성인으로 한국 순교 103위 순교성인 중에 포함되어있습니다.

기해박해 이후 국경 감시가 엄해져 외국 선교사들이 육로로 조선 입국이 불가능해지자 1845년 이래 해로개척을 하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제3대 조선 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충청도 강경의 황산포로 입국하게 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1846년 봄 페레올 주교는 중국에 있는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신부 등이 입국할 수 있도록 새로운 해로 개척을 지시하였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이 지시를 받고 연평도와 백령도를 항해하며 중국 어선과 접촉하여 편지와 해로도(海路圖)를 중국에 전하려하다가 6월 5일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당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체포는 조선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외국 선박의 출몰과 외국인들의 국경 침범까지를 문제 삼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체포로 중국 어선을 통해 전하려던 편지와 지도는 압수되었으며 김대건 신부와 관련된 신자들 대부분이 체포당하여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가 감옥에 있는 동안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 함장이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남도 보령시 외연도에 나타나 기해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 3명을 학살한데 항의하고 돌아간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오히려 김대건의 사형판결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9월 5일 묘당회의에서 영의정 권돈인과 대신들이 주청하여 사형 판결을 내리게 하여 김대건과 현석문은 각기 군문효수 형을 받아 순교하고 임치백, 남경문, 한이형, 이간난,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 등이 매 맞아 죽는 장사(杖死)로 순교하였습니다.

이미 박해를 겪어 온 신자들은 박해 소문을 듣고 이내 피신하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즉시 활동을 중지하고 안전한 교우촌에 피신하여 교회는 큰 타격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조정에서도 더 이상 신자들을 찾아내려 하지 않아 교회 활동은 이내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페레올 주교에 의해 조사되어 1846년 11월 3일자 서한인 "병오일기"에 기록되어 시복 시성에 귀중한 자료로 사용되었습니다.

 

4. 병인박해 (丙寅迫害, 1866년)


병인박해는 1866년(고종 3년)에 시작되어 1873년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병인박해는 조선 왕조의 네번째, 전국적인 박해로 가장 참혹하고 희생이 큰 천주교 4대 박해 중 하나입니다. 박해를 마감하는 윤음이나 명령이 반포되지 않아 1877~1879년 사이에도 신자들이 체포당하고 순교하였습니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신자는 대략 8천명에서 1만 명이나 이들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였습니다.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 중에서도 아직은 24명만 성인을 선포되어 한국 순교 103위 성인 중에 들어 있습니다.

1860년 10월 영,불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놀란 집권세력은 1864년 이래 남하정책을 편 러시아의 통상요구를 막는데 천주교 세력을 이용해 보려했습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64년 8월에 제4개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프랑스가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막아 준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라고 제시하였습니다. 처음에 주저하던 교회 측에서도 이에 응하려고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가 서울로 와서 기다렸으나 1866년 2월 23일 갑자기 포졸이 몰려와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 등을 체포해 가며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그간의 국제정세 변화와 천주교를 배척하는 정치세력들의 공세로 인하여 태도를 돌변하여 천주교를 이용해 보려는 자세에서 박해로 바꾸어 길고도 참혹한 박해가 계속되었습니다.

병인박해는 대체로 4단계로 나누어 볼 수가 있는데, 제 1단계는 1866년 봄의 박해 시작이었고, 제 2단계는 1866년 10월 병인양요로 인한 박해의 확대이며, 조정에서는 '병인척사윤음'을 반포했습니다.

제 3단계는 1868년 충청도 덕산에서 "남연군묘 도굴사건" 또는 "오페르트 도굴사건"이라고도 하는 일이 일어나 박해는 다시 확대되었습니다.

제 4단계는 1871년 신미양요로 박해가 다시 확대되고 척화비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자 총수가 2만 3천 여명 정도였는데 순교자 수가 대략 1만 명으로 추산되니 교회가 맏은 충격은 막대했습니다. 수집된 자료로 간행된 '치명일기'에만도 순교자 877명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선교사들 모두가 순교하거나 탈출하여 한국 교회는 또 다시 목자 없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척사에만 치우쳐 천주교에 대해서 무모한 탄압과 학살을 자행하여 결국 자신의 실각을 앞당기게 하여 박해도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통하여 순교신심은 더욱 깊어지고 순교자 현양운동이 일어나면서 한국 교회는 더욱 깊은 영성을 지니며 현대교회에로 발전해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를 하면서, 조선시대에 박해를 당하고 순교하신 분들의 행적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합니다. 주로 신념, 희생 등의 덕목에 대해서 많은 생각이 듭니다.

 

103위 순교성인, 124위 복자 대부분이 4대 박해 때 순교하셨죠.

 

이 땅의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신 순교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