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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성지순례51

답동 주교좌성당은 아름다운 겉모습과 성전 안 예쁜 유리화를 가진 성당입니다. (+미사 시간 안내) 인천 답동 주교좌성당의 역사와 특징 인천 답동 주교좌성당이 있는 답동(畓洞)은 옛날에는 '논골'이라고 불리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후에 한자 표기로 답동으로 바뀌어집니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드디어 신앙의 자유를 부분적으로나마 얻게 되자 그 당시 블랑 주교는 개항지인 제물포가 선교의 주요 거점이 되리라는 예상을 하고 본당 건립을 준비하게 됩니다. 1889년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빌렘 신부는 제물포본당(지금의 답동 주교좌본당입니다. 현재 제물포성당은 따로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에 있습니다.)에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여 임시 성당에서 사목합니다. 신자가 늘어나자 약현성당, 명동대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E. Coste, 1842~1896)에게 답동성당을 설계하여 1897년에 준고딕 양식.. 2024. 12. 10.
남방제 천주교 성지 순례 (+미사 시간 안내) 남방제 천주교 성지의 의미와 역사  조화서 베드로 성인은 그의 아버지 조 안드레아(1839. 기해박해)가 순교한 후에 ‘수원 도마지(지금의 평택)’에서 남방제로 이주하여 살았고 한 막달레나와 결혼하여 조윤호 요셉 성인(1848)을 낳아 성가정을 이루었습니다.조화서 베드로 성인은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마부와 복사로 선교 활동을 돕고 전국의 신자촌으로 모시고 다녔습니다.‘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의하면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 도(道)와 5천여 리(里)를 걸으며, 수많은 신자를 방문하였습니다. 순방 중에 포졸들의 습격과 외교인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수없이 쫓겨나고 붙잡혀서 갖은 고생을 다하였습니다.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경신박해(1860) 때, 갇혔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와 경상.. 2024. 9. 17.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미사 시간 안내)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 천주교 순교성지의 의미와 역사 서소문 즉 소의문(昭義門)은 아현과 남대문 밖의 칠패시장으로 연결되던 문으로 새벽부터 사람들이 많이 붐비던 곳이었습니다. 서소문 밖 형장은 현재 서소문로와 의주로가 교차하는 서소문 공원 인근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서소문 역사 공원과 인근 부지가 조선의 공식 처형지로 등장한 것은 태종 16년인 1416년이었습니다.개국 초 동대문 밖에서 사형을 집행하던 조선 조정은 "형장은 사직단 서쪽에 두어야 한다."는 [예기]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기록을 근거로 서소문 밖을 사형장으로 삼았고, 주로 능지처사나 효수, 사사 등 중죄인의 형장으로 이용하였습니다.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는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로 역사에 등장하였습니다. 경복궁에서 바라볼 때는 이곳이.. 2024. 9. 17.
절두산 천주교 성지의 역사, 의미, 성지 순례 후기 (+미사 시간 안내) 절두산 순교 성지의 역사, 유래, 순례 후기 양화진은 서해의 강화에서 수도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고려시대부터 버들꽃이 어우러진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였습니다.1866년 가을,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 침략에 앞서 수로와 도성을 탐색하기 위하여 양화진까지 진출하였습니다.조선 조정에서는 서양 오랑캐가 다녀가 더럽혀진 곳은 그들과 통한 천주교인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는 명문을 내세워 양화진을 천주교인 처형지로 삼았습니다.  잠두봉은 박해 당시에 많은 이들이 담대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증거하여 치명한 곳이라 하여 "절두산(切頭山)"이라 불리기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양화진에서 순교한 천주교인은 300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순교자는 29명이며, 그 행적.. 2024.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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