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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성지순례75

천주교 성지로서 포도청의 역사와 순례 후기 포도청의 역사와 천주교 성지로서의 의의 포도청의 기원은 조선 성종 때 좌,우 포도장을 임명한 데에서 시작합니다. 정식으로 좌,우 포도청(일명 좌,우변)을 설치한 것은 중종 떄(16세기)로, 이후 350여 년 동안 존속되다가 갑오개혁 때인 1894년 7월에 폐지되었으며, 그 후에는 경무청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좌포도청은 파자교(把字橋) 동북쪽 자리였다고 합니다. (현재 종로구 묘동 56번지, 예전에 영화관 단성사가 있던 자리이고, 현재는 귀금속상가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포도청은 혜정교(惠政橋) 남쪽에 위치했다고 합니다. (현재는 종로1가 89번지, 광화문우체국과 동아미디어 근처입니다.) 조선시대에 포도청은 포도(捕盜 ; 도둑 잡기)와 순라(치안), 임금 거동시 호위업무를 했습니다.또한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2024. 6. 21.
서울대교구 성직자묘지 & 용산성당 (+ 미사 시간) 용산성지성당의 역사와 특징 용산성당 내 성직자 묘지는 모든 삶을 오롯이 주님 앞에 바친 가톨릭 성직자를 모시기 위해 서울대교구에서 마련한 곳입니다. 1887년 3월, 서울 교구에서는 신학교 건립과 묘지 조성을 위해 원효로4가와 산천동 일대의 임야를 매입했습니다.원효로4가 함벽정(涵碧亭)에는 신학교(현재 성심여고 내)를, 산천동 산비탈 삼호정(三亭) 위에는 성직자 묘지를 조성하였는데, 이 곳은 순교지 새남터가 눈 아래 내려다 보이는 뜻깊은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써 이 일대 신자들의 신앙공간이 되었고 용산성당 설립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1940년대 초부터 용산신학교의 성모성심성당에서 성사를 집전하던 라리보(A. Larribeau) 주교는 1942년에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킬 것을 서울교구장에게 승인 .. 2024. 6. 21.
용산 성심 신학교와 원효로 예수성심성당 성지 순례 후기 용산 성심 신학교의 설립배경 조선 땅에서 신학생 교육을 위하여 설립된 최초의 신학교는 1855년 충청북도 제천에 자리 잡은 성 요셉 신학교 즉 '베론 신학당'이었습니다.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 때 폐쇄당하였고, 1885년 경기도 여주군 부엉골에 신학교가 다시 개교되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1886년 한불수호조약 체결 후 파리외방전교회가 순교지로 이름난 한강 새남터 서북방에 있는 용산 함벽정 일대의 땅을 매입하고, 1887년 3월 부엉골 신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교명을 '예수성심 신학교'로 개칭하였습니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의 첫 서양식 교사 건물은 코스트 신부의 설계와 감리로 1892년 6월 완공하여 소신학교 건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1960년대에 철거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 2024. 6. 19.
깊은 역사를 간직한 익산 나바위성지성당 (+ 미사 시간 안내) 나바위성지성당의 역사, 특징, 성지 순례 후기 나바위라는 지명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성당이 있는 곳에 옛날에는 소박하게 작은 산이 있는데, 조선 시대에 우암 송시열 선생은 이 산이 매우 아름답다고 해서 화산(華山)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그래서인지 예전에는 '화산천주교회'로 불리기도 했답니다. 이 조그마한 산 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너른 바위가 펼쳐진다고 해서 나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그런데 실제로 와서 보면 산이라기보다는 소박한 동산에 가깝죠. 나바위 성지는 이 땅의 첫 번째 천주교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1845년 10월 12일 밤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1857년에 주교가 됩니다.)와 함께 작은 배로 조국에 입국한 것을 기념하는 성지입니다... 2024.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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