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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성지로서 경기감영 터의 역사 천주교 성지로서 의미를 지닌 경기감영 터 1784년 명례방에서 조선 천주교회가 창립된 이후로 성장해 오던 경기 지역의 신앙 공동체들은 신유박해(1801)를 기점으로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때 경기도 지역의 신자들이 끌려와 형벌과 문초를 겪으며 신앙을 지켰던 곳이 바로 경기감영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순교한 순교자 중에서 2014년 복자품에 오른 조용삼 베드로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에게 천주교 신앙을 배우며 따르다가 체포되어 세례도 받기 전에 11개월 동안 감옥게 갇혔습니다.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은 조용삼은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에 끌려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습니다. 결국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지난 3월 27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형벌 때에 박해.. 2024. 6. 21.
천주교 성지로서 의금부 터 거룩한 신앙 선조들의 시련을 느낄 수 있었던 의금부 터 조선 시대 사법 기관에는 의금부, 형조, 한성부, 사헌부 등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형조, 의금부, 한성부를 삼법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의금부는 고려 시대의 순군만호부제도를 계승한 기관이었습니다. 1414년 태종 때 의금부로 개편되었습니다. 1453년에 순라 업무가 군부인 삼군진무소로 이관됨을 계기로, 국왕의 특별한 명령을 받아서 양반 및 대역죄 등 국가 안위에 연결되는 중죄인의 재판을 담당하였습니다. 금부, 금오, 와부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의금부는 어명으로 사형 선고를 내리던 최고 재판소였습니다.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면서 지도급 천주교인을 국사범, 반역모반죄인으로 엄격하게 다스렸습니다. 주교, 신부, 주요 평신도 지도자들은 대부분 의금부.. 2024. 6. 21.
천주교 성지로서 포도청의 역사와 순례 후기 포도청의 역사와 천주교 성지로서의 의의 포도청의 기원은 조선 성종 때 좌,우 포도장을 임명한 데에서 시작합니다. 정식으로 좌,우 포도청(일명 좌,우변)을 설치한 것은 중종 떄(16세기)로, 이후 350여 년 동안 존속되다가 갑오개혁 때인 1894년 7월에 폐지되었으며, 그 후에는 경무청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좌포도청은 파자교(把字橋) 동북쪽 자리였다고 합니다. (현재 종로구 묘동 56번지, 예전에 영화관 단성사가 있던 자리이고, 현재는 귀금속상가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포도청은 혜정교(惠政橋) 남쪽에 위치했다고 합니다. (현재는 종로1가 89번지, 광화문우체국과 동아미디어 근처입니다.) 조선시대에 포도청은 포도(捕盜 ; 도둑 잡기)와 순라(치안), 임금 거동시 호위업무를 했습니다.또한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2024. 6. 21.
서울대교구 성직자묘지 & 용산성당 (+ 미사 시간) 용산성지성당의 역사와 특징 용산성당 내 성직자 묘지는 모든 삶을 오롯이 주님 앞에 바친 가톨릭 성직자를 모시기 위해 서울대교구에서 마련한 곳입니다. 1887년 3월, 서울 교구에서는 신학교 건립과 묘지 조성을 위해 원효로4가와 산천동 일대의 임야를 매입했습니다.원효로4가 함벽정(涵碧亭)에는 신학교(현재 성심여고 내)를, 산천동 산비탈 삼호정(三亭) 위에는 성직자 묘지를 조성하였는데, 이 곳은 순교지 새남터가 눈 아래 내려다 보이는 뜻깊은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써 이 일대 신자들의 신앙공간이 되었고 용산성당 설립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1940년대 초부터 용산신학교의 성모성심성당에서 성사를 집전하던 라리보(A. Larribeau) 주교는 1942년에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킬 것을 서울교구장에게 승인 .. 2024.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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