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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성지순례51

(천주교 서울대교구) 형조 터 한국 천주교 성지로서 형조 터의 의미  형조는 조선 시대의 중앙 관서인 육조 중의 하나였습니다. '추관' 또는 '추조'라고도 하였으며 사헌부, 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라 일컬어지기도 하였습니다. 형조는 한성부 서부 적선방에 있었는데,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많은 천주교인이 형조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 시작은 정조가 즉위한 지 9년째 되었던 1785년에 발생한 '을사추조 적발사건'이었습니다.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 집에서 신앙 집회를 갖던 신자들이 금리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된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최필공 토마스,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정철상 가롤로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김천애 안드레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유지헌 프란치스코.. 2024. 6. 21.
천주교 성지로서 경기감영 터의 역사 천주교 성지로서 의미를 지닌 경기감영 터  1784년 명례방에서 조선 천주교회가 창립된 이후로 성장해 오던 경기 지역의 신앙 공동체들은 신유박해(1801)를 기점으로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때 경기도 지역의 신자들이 끌려와 형벌과 문초를 겪으며 신앙을 지켰던 곳이 바로 경기감영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순교한 순교자 중에서 2014년 복자품에 오른 조용삼 베드로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에게 천주교 신앙을 배우며 따르다가 체포되어 세례도 받기 전에 11개월 동안 감옥게 갇혔습니다.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은 조용삼은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에 끌려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습니다. 결국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지난 3월 27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형벌 때에 박해.. 2024. 6. 21.
천주교 성지로서 의금부 터 거룩한 신앙 선조들의 시련을 느낄 수 있었던 의금부 터   조선 시대 사법 기관에는 의금부, 형조, 한성부, 사헌부 등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형조, 의금부, 한성부를 삼법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의금부는 고려 시대의 순군만호부제도를 계승한 기관이었습니다. 1414년 태종 때 의금부로 개편되었습니다. 1453년에 순라 업무가 군부인 삼군진무소로 이관됨을 계기로, 국왕의 특별한 명령을 받아서 양반 및 대역죄 등 국가 안위에 연결되는 중죄인의 재판을 담당하였습니다. 금부, 금오, 와부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의금부는 어명으로 사형 선고를 내리던 최고 재판소였습니다.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면서 지도급 천주교인을 국사범, 반역모반죄인으로 엄격하게 다스렸습니다. 주교, 신부, 주요 평신도 지도자들은 대부분 의금부.. 2024. 6. 21.
천주교 성지로서 포도청의 역사와 순례 후기 포도청의 역사와 천주교 성지로서의 의의 포도청의 기원은 조선 성종 때 좌,우 포도장을 임명한 데에서 시작합니다. 정식으로 좌,우 포도청(일명 좌,우변)을 설치한 것은 중종 떄(16세기)로, 이후 350여 년 동안 존속되다가 갑오개혁 때인 1894년 7월에 폐지되었으며, 그 후에는 경무청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좌포도청은 파자교(把字橋) 동북쪽 자리였다고 합니다. (현재 종로구 묘동 56번지, 예전에 영화관 단성사가 있던 자리이고, 현재는 귀금속상가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포도청은 혜정교(惠政橋) 남쪽에 위치했다고 합니다. (현재는 종로1가 89번지, 광화문우체국과 동아미디어 근처입니다.) 조선시대에 포도청은 포도(捕盜 ; 도둑 잡기)와 순라(치안), 임금 거동시 호위업무를 했습니다.또한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2024.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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